노년에 깊이 다가갈수록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질문은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다. 자기 삶에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면 타인의 위로와 포용도 별 의미가 없다고, 반드시 스스로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파머는 생각했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질문이 그릇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질문은 고통스런 세상이 펼쳐질 때 아무리 곱씹어도 답을 낼 수 없고, 스스로에게 ‘좋아요’를 누르든 ‘싫어요’를 누르든 거기엔 우쭐대는 자아가 만들어낸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인정할 것은 이것이다. “나는 태양계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만물 가운데 하나인 나는 삶의 의미를 지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고, 태양 아래 서서 자신과 타인들이 성숙해가도록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무엇인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 모두가 나 자신이다.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 빛 속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 모두 나 자신이다. 나의 배반과 나의 충성심, 나의 실패와 나의 성공 모두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무지이고 나의 통찰이며, 나의 의심이고 나의 확신이다. 또한 나의 두려움이고 나의 희망이다.”

완전함과는 거리가 먼 생애 동안 마구잡이로 헤쳐온 오르막 내리막 길에서 삶은 여전히 최고 속도로 거칠게 펼쳐지고 있다. 붙잡고 싶은 욕망과 그로 인한 결핍은 공포를 자아낸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아름다운 것이 둘러싸고 있고, 늙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뜻이므로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싶다는 욕망도 자아낸다. 이제 나이든 나는 너그러움을 품고 그 안으로 시들어가고 싶다는 것이 저자의 바람이다.

그늘 없는 영혼에는 삶이 비밀을 감추는 걸까. 삶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파커는 세 차례나 겪었다. 수개월 동안 차양을 내린 채 폐쇄된 방에 머물자, 친구는 그에게 좀더 자주 외출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그때 파머가 한 대답은 우울증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럴 수 없어. 세상이 칼로 가득 찬 느낌이야.”

40년 동안 그는 ‘더 위로 더 멀리’ 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는 네 가지를 추구했는데,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 좋은 가치다. 하지만 이를 뒤쫓다보면 인간 능력의 오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네 가지는 이렇다. 첫째, 지성(생각하기)의 능력에 가치를 두었다―즉 가슴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둘째, 자아의 힘을 과신했다―신경증적 두려움을 위장하면서. 셋째, 지상을 넘어선 비상하는 영성을 추구했다―그러나 그것들은 삶의 자잘한 요소들과 연결되지 못했다. 넷째, 도달할 수 없는 윤리를 추구했다―그러나 그것들은 타인들의 이미지로 형성되는 윤리였을 뿐이다. 이 네 가지 당위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자 파머는 죄의식을 갖게 됐고, 스스로를 나약하고 미덥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됐다.

이때 우울증이라는 친구가 나타나 파머의 이름을 부르며, 관심을 끌려고 애쓰면서 계속 쫓아왔다. 그 목소리가 두려워 파머는 애써 무시한 채 계속 걸었다. 그러자 친구는 더 가까이 다가와 그의 이름을 큰 목소리를 불렀고, 급기야 소리 질렀다. 묵묵부답이 계속되자 그 친구는 돌을 던지며 막대기로 파머를 치기 시작했다. 막대기와 돌로도 안 되자 그 친구는 우울증이라는 바위를 파머에게 떨어뜨렸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친구가 바위로 친 것은 그를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돌려세우기 위함이었다.

“저는 높은 성취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왜냐하면, 음, 낮은 곳보다 높은 곳이 더 좋으니까요.” 그런가? 틀렸다. 이제야 지상으로 내려온 파머는 높은 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누구든 넘어질 때가 있다. 높은 데서 넘어지면 멀리 떨어질 것이고, 그런 추락은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다. 반면 땅에서의 삶은 (우리 본성과 더불어, 세상과 진짜 맺고 있는 땅에 발 딛고 있는 삶은) 우리가 발을 헛딛거나 넘어져도 큰 상처 없이 스스로 일어나 툭툭 털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도록 해준다. 김찬호 정하린 엮. 글항아리. 값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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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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