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4일 홍콩에서 사굉옥션仕宏拍賣 주최로 골동보이차 경매가 열렸다. 호급차와, 인급차, 숫자급차 외 2000년 이후의 신차를 포함한 총 120여 종의 보이차가 출품 되었다. 이번 경매의 꽃은 1920년대 생산된 홍표 송빙호였다.HKD3,000,000(한화 4억6천5백)의 낙찰가로 새로운 기록을 올렸다. 또 동흥호 중에서 가장 먼저 생산된 향질경向質卿 동흥호同興號 한통은 HKD 8,400,000(한화 13억)에 낙찰 되었다. 반면에 같은 시기에 생산된 보경호普慶號와 상황금당上黃錦堂 동창호同昌號 유찰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일
몇 년 전부터 거리에 한 집 건너 커피집이 생겨나기 시작해서 이제 시골 오일장 어귀에서 조차도 커피 전문점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닌 일이 되었다. 어찌하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먼 타국 땅이 원산지인 커피에 열광하게 되었을까? 본격적으로 커피가 우리 주변에 보이게 된 것은 아무래도 6,25이후 휴전이 되고 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어릴 적 기억으로 우리 집에서도 인스턴트커피와 소위 무거리(?) 우린 그렇게 부르던 원두를 갈아서 깡통에 담아 나오던 MJB 초록색 라벨과 붉은색 라벨이 붙은 커피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맹해차창은 1940년에 운남성 서쌍판납태족자치주 맹해현에 설립되었다. 당시는 불해차창이라고 불렸다. 맹해차창은 설립이후 2004년 대익으로 민영화되기까지 국가 운영 공장으로서 소비자에게 꾸준하게 인기를 얻었다. 맹해차창에서 2000년 이전에 생산된 차들은 이미 20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노차老茶, 혹은 진년차陳年茶로서 가치가 형성되면서 소장가치가 높아졌다.맹해차창에서 생산한 차들이 특별한 이유는 현재 골동 보이차 시장에서 인기가 있는 차의 대부분은 맹해차창에서 생산된 차들이기 때문이다. 인자급 보이차인 홍인을 비롯하여, 무지홍인,
작년 9월 15일 도쿄 메구로구 유텐지(東京都 目黒区 祐天寺) 에 있는 7평 남짓 되는 식당, 마고MARGO에서‘다이보커피점大坊珈琲店’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이곳은 유기농음식과 와인을 팔았지만, 출판기념회가 있는 15일과 16일 양일간은 정상영업을 중단하고 다이보커피점의 커피를 판매했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준비된 커피콩이 떨어지면 영업을 종료하는 행사로, 다이보커피점 주인인 다이보 카츠지(大坊 勝次)씨가 자신의 출판기념회에 오는 고객들을 위해 손수 커피를 추출했다. 그날 준비된
현재 보이차 시장에서 1990년대 보이차의 가격은 맹해정창인지 개인차창인지에 따라 큰 격차가 있다. 가격 형성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의 보이차 생산에 대해 먼저 알 필요가 있다. 1990년은 보이차 생산에서 중요한 기점이 되는 시기이다. 1980년 후반부터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 1990년까지 국가 운영만 가능하던 상업이 민영화로 바뀌게 되면서 개인의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차 생산에도 개인 차창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시장 상황이 좋지 못하여 대량 생산이 없었다.중국 내수 차 시장은 1990년대
일반적으로 전통과 맥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같으면서 다른 차이가 있다. 전통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역사의 보편적 개념이라면 맥은 그보다 규모가 적은 집단이나 개인의 실체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절집에 다맥이 없다하니 전통이 없다는 말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어 부연하는 말이다. 속가에서 집안의 가풍은 흔히 몇 대 종손댁이라 하며 그 집안의 맥을 이어오고 있음을 말하고, 그 집안의 가풍 즉 전통은 종손댁을 중심으로 모두가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전통은 공유의 개념에 비중을 두는 것이고, 맥은 독점적인 것에 비중을 둔
골동보이차를 통한 보이차의 이해보이차 시장에서 가장 큰 오해는 보이차는 세월이 오래 될수록 비싸진다는 인식이다. 보이차를 이해하기 위해 1990년 이전의 보이차로 거슬러 올라서 분석할수 있다. 골동보이차는 1950년 이전에 생산한 호급號級, 1950~70년 사이의 인급印級, 1970년 이후에 생산된 숫자급으로 구분한다. 생산 시기가 가장 오래된 호급 보이차에서도 1980년대 숫자급 보이차보다 가격이 싼것이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 대표적으로 1930년대의 정흥호鼎興號, 같은 시기에 생산된 하내호河內號,
국내 보이차가 1980년대 말부터 조금씩 보급 되었으니 벌써 30년을 훌쩍 넘어 가고 있다. 그 동안 보이차 시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초기 자료 부족으로 인한 보이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불신도 꾸준한 연구와 많은 단행본의 번역과 출간을 통해 보이차의 실체적인 접근을 어느정도 이루었다. 최근에는 홈쇼핑을 통해서 판매가 이루어질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크게 상승했다.현재 보이차 시장의 큰 축은 골동보이차를 중심으로 한 노차시장과 고수차의 열광으로 형성된 신차시장으로 나뉘어졌다. 즉 발효된 맛을 추구하는 노차
한국차계는 한 마디로 말하면 압사지경이다. 차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은 기승전결 모두 중국차의 열풍에 휩쌓여 있다. 백차에서 시작해 보이차, 청차, 흑차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중국차의 위력에 녹차와 발효차의 영역에 갇혀 있는 한국차가 설자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차 뿐만 아니다. 찻그릇을 포함한 차도구 영역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차시장의 거대화로 인해 중국의 값싸고 질 좋은 중국의 차도구가 차 공예가들을 서서히 숨막히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차와 차도구들이 나쁜가. 그렇지 않다. 한국의 녹차와 발효차는 안정성을 시작으로 맛과
이제 선선한 갈바람과 함께 차를 들며 명상하기에 좋은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때에 맞춰 전국에서 각종 차 행사가 활발히 열릴 것이다. 차인들이나 차 관련 학계에서 국가 예산 지원을 받아 대형 차 행사를 여는 것은 대중에게 차의 우수성과 차문화의 중요성을 널리 인식시켜 차생활의 대중화 및 차 시장 확산을 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행사가 차 상업주의에 지나치게 매몰되거나 현실과 유리된 채 허공을 향하게 되면 오히려 차에 대한 혼란과 불신을 야기하여 대중을 차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할 우려가 있
2010년이면 10년 전 일이다. 그해 나는 오른쪽 팔 신경이 파열되었다. 높은 온도에 손으로 차작업을 하는 일은 기계가 움직이는 수준의 속도가 필요하다. 해마다 덖음차를 1톤가량 덖어댔으니 팔인들 제대로 남았겠는가. 결국 팔 신경이 파열 되어서 수술을 했다. 덕분에 팔에 흉하게 약 20cm 정도 긴 흉터가 생겼다. 하늘은 나의 차 사랑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시 차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팔을 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2010년 7월 27일 날짜로 제목은 < 대숲 아래 뒤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기록되어 있다.삶이 그러하듯
그해 여름 기억이 생생하다. 곰팡이 사건은 차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2011년 8월 3일분명 실패한 작품이다. 1,000kg이 넘는 차 중에 보관 해 두었던 차 한뭉치가 옮기려는 도중 그 무게감이 다른 뭉치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뭉치를 보관해 둔 것을 풀어 헤쳐 보니 순간 아찔했다. 보관이 잘못 됐던지 아니면 수분이 덜 제거 되었던지 전체적으로 옅은 곰팡이가 확 피어 있었다. 뭉쳐진 차 덩이에는 단 한번도 경험 하지 않았던 노란 곰팡이가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이걸 버려야 하나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긴 장마속에 마
나에게 차는 삶이고 수행이며 창조개발이다. 이른 아침 차 벗이 전화가 왔다. 며칠 전 받은 차가 맛이 전같지 않고 더 순하다고 한다. 다짜고짜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을 해 달라고 한다. 이렇게 예민하고 섬세한 차벗이 있어서 나의 차 연구는 끝이 없다. 천천히 차를 연구했던 옛 기록들을 살펴본다.2011 6월 11일. 발효차를 만들어 보관하는 공간에 문만 열면 차가 익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제부터인가 덖음차를 지속적으로 마시면 속을 차게 해서 위를 갂는다는 결론이 무성하다. 중국차가
1992년 6월초 전각가篆刻家에게 은사스님 낙관落款을 부탁하러 인사동에 갔다가 다암茶庵에 들렸다. 주인 안정태 보살님이 젊은 여인들과 차를 마시고 있기에 그냥 돌아 나오려고 했더니, 잘 오셨다며 일어나 자리를 권하는 것이었다. 점심공양을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도 차 생각이 나던 참이라 주저앉아서 차를 얻어마시기로 했다.묵묵히 차를 마시며 먼저 있던 젊은 여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다도에 대한 전문가들처럼 서로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우라센케裏千家, 오모테센케表千家,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등의 용어가 계속
한 때 나는 열심히 기록했다. 차를 만들면서 그때 그때 세밀하게 반응 하는 나의 감정까지 기록했다. 차에 대한 전문 지식보다 내가 찻잎을 대하는 마음자세와 찻잎이 나에게 주는 기운까지 감지되고 느껴지는 대로 기록 했다. 당분간 에 그런 생생한 기록들을 공개하려고 한다. 가장 첫 번째로 2011년 5월 30일 기록 된 글을 소환한다. 제목은 < 값진 실패, 발효차> 라고 적혀있다. 무엇이든지 실패를 통해서 좌절 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 2010년 50kg의 찻잎을 왕창 망쳤다. 의도한 차 맛을 내기 위하여
1999년이전에는 덖음차만 만들었다. 냄비 하나 걸고 한해 동안 마실 차를 준비했다. 2000년 봄 부터 차솥을 4개를 걸고 덖음차를 1톤씩 만들었다. 지금 생각 해봐도 아찔하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을까. 그때 경험이 차 맛을 찾아 내는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누가 아홉번을 덖었니, 초의선사가 이렇게 덖었을거라니 저렇게 덖었을거라니 온갖 말들이 난무했다. 나는 그런말에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직접 경험해서 얻은 것으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2003년 처음으로 세상 밖 차꾼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
는 나의 평생 숙원 사업이다. 차 문화가 기성세대들의 전유물처럼 알려져 젊은이들로 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 때문이다. 나의 젊은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어른 스님들께 귀하게 얻어 마시는 차가 늘 갈증이 났고 구하기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내가 직접 차를 덖게 되었고 30년 넘도록 차 맛을 찾아 오늘 날 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는 나이가 드니 차를 덖는 일이 힘에 부친다. 그동안 계속 차 만드는 일을 누군가가 물려받아 배웠으면 했는데 그 인연이 쉽지 않았다.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
차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땅 한 평 없었을 때 나에게 아주 큰 산 하나가 통째로 시주가 들어왔다. 지금 기억에 1993년 이었던것 같다. 산이 통째로 왔음에도 그곳에 집을 건축할 능력이 없었다. 다행이 산 옆에 송어 양식장을 하던 작은 빈집이 있었다. 외딴 곳에 버려진 집이었다. 나는 걸망에 있는 돈으로 인사동에 가서 한지를 사 도배를 했다. 블록으로 지은 집으로 화장실도 계곡물을 이용해서 수세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방바닥에 보일러도 없고 아궁이도 없었다. 연탄아궁이를 놓고 석달간 손수 고치고 나니 제법 집 모양이 나왔다.시주 받은
차를 마시자. 우리차를 마시자. 외치면서도 정녕 내가 내 놓을 수 있는 대안이 없었다. 뛰는 인건비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인건비도 건질 수 없는 찻잎을 채취할 노동력도 농촌에는 부족하다. 어린 우전 잎 한 사람당 하루 채취할 수 있는 량이 1kg 도 어렵다. 완성 된 차를 잘 만들려면 네 사람이 하룻밤을 꼬박 세워도 10kg를 만들기 어렵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우리 차의 가격은 당연히 비싸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값싼 차를 찾는 소비자들은 중국 차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역시
차를 덖고 연구하고 차를 마시면서 찻 그릇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왔다. 그렇다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볼 줄 모르는 까막눈은 아니었다. 다만 형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내가 차려 놓은 찻자리에서만 사람들을 맞이하고 바깥에 나가서 차를 마실 일이 전무후무 하던 시절 우연히 어느 스님의 차실을 들리게 되었다. 그 스님은 은다관으로만 차를 마셨다. 물론 나에게도 은 다관이 하나 있었다. 잘 사용하지 않았다. 떠도는 헛 소문(?) 때문이다.그 스님 덕분에 분에 넘치는 은 다관을 가지게 되었지만 호사를 누리는 듯하여 사용하지 않고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