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물건엔 각기 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명작도 예외가 아닙니다. 노년의 어느 날 추사가 모처럼 난을 칩니다. 이십여 년 만이라지요. '달준達俊'이라는 어린 시동에게 그려주고 싶어서 마음을 냅니다. 붓 몇 가닥에 무심한 선적 정취가 군더더기 없이 오롯합니다.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릴없이 들린 객이 그만 욕심을 냅니다. 체면불구하고 지청구를 댑니다. 그 덕에 그림의 주인이 바뀝니다. 추사가 난蘭 그림을 그에게 주되, 여백에 잔뜩 그 사연을 적어 놓습니다. 이른바 추사체로 도배가 되었겠지요
곧 민족의 명절인 설이다. 설은 온 가족이 모여 올 한해를 건강하고 무탈하게 보낼 수 있도록 기원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설날에는 온 가족이 함께 만든 음식을 따뜻한 마음으로 나눠 먹는다. 설은 그래서 가족들의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은 늘 그렇듯 불공평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설날 함께 먹을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광명한 사회에 아직도 살얼음이 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 하다.매년 이럴때면 나타나는 측은지심의 나한들이 있다. 광주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나한이 5년전부
차계의 유일한 인터넷 신문인 뉴스 차와문화에서 2020년 새해를 맞아 위기에 빠진 한국차계를 진단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그 첫 번째인 한국차문화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에 대해 (사)남도정통제다. 다도보존연구소 최성민 소장이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에 전문을 싣는다.앞글에서 한국 차문화 쇠락의 이유로 ‘다례가 중심이 된 전통 차교육’을 지적하고, 그것들은 1980년 후반에 정립된 ‘그들만의 리그’라고 분석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거도 없고 철학성도 없이 최근에 급조된 국적 불명, 정체 불명의 상업성 ‘다례’라는 것이
34년간 21세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락구기법을 연구하고 있는 양동엽작가는 자연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발색작업을 작품에서 구현해내고 있다. 그것은 작품의 소장자에게 항상 가까이에서 즐겁게 즐길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다. 양동엽 작가는 “ 그릇은 아름다워야 하고, 눈으로 보기에 즐거워야하고, 사용할 때 촉감이 좋아야 한다고 봅니다. 락구다완은 가루차의 생명인 격불과정에서 거품이 잘생겨나야 하고 차 맛이 독하지 않고 부드럽게 하는 특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도예아카데미연구원 원장인 해동 양동엽은 캐나다 밴프 예술센터와 캐나다
몸과 마음을 꽁꽁 싸매는 추운 겨울이다. 겨울은 침묵의 시간이다. 침묵은 입을 닫고 귀를 닫고 마음을 여는 새로운 길이다. 침묵 속에 피어나는 고요한 은둔의 외침이 있다. 무념무상의 세계가 열린다. 희喜. 노老. 애愛. 락樂의 오욕칠정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무념무상의 세계는 없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걸 배우고 느끼고 겪어본 후의 깨달음이다. 인간은 늘 후회 속에 살아가는 존재다. 그것이 인간이다. 나약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다. 나약함을 이기기 위해서 때론 위선을 숨기고 산다. 권력자들은 더욱 위선을 드러내고
70년대부터는 칠자병차 시기이다. 포장지 디자인에서 운남칠자병차로 인쇄되어 칠자병차라고 한다. 칠자병차는 1972년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운남성차엽분공사가 생겨난 이후 보이차의 고유 이름을 숫자로 표기하였다. 차의 명칭을 숫자로 표기하였지만 유통과정에서는 차의 상태, 포장지의 특징을 따서 부르기도 한다.7432, 7532, 7542, 7572, 7582, 8552 등은 생산 차창에서 명명된 이름이다. 대황인大黃印, 수람인水藍印, 대람인大藍印, 소녹인小祿印, 대구중大口中, 홍대청병紅帶靑餠, 설인雪印, 상검8582(商檢8582), 88청
지난 11월24일 홍콩에서 사굉옥션仕宏拍賣 주최로 골동보이차 경매가 열렸다. 호급차와, 인급차, 숫자급차 외 2000년 이후의 신차를 포함한 총 120여 종의 보이차가 출품 되었다. 이번 경매의 꽃은 1920년대 생산된 홍표 송빙호였다.HKD3,000,000(한화 4억6천5백)의 낙찰가로 새로운 기록을 올렸다. 또 동흥호 중에서 가장 먼저 생산된 향질경向質卿 동흥호同興號 한통은 HKD 8,400,000(한화 13억)에 낙찰 되었다. 반면에 같은 시기에 생산된 보경호普慶號와 상황금당上黃錦堂 동창호同昌號 유찰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일
몇 년 전부터 거리에 한 집 건너 커피집이 생겨나기 시작해서 이제 시골 오일장 어귀에서 조차도 커피 전문점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닌 일이 되었다. 어찌하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먼 타국 땅이 원산지인 커피에 열광하게 되었을까? 본격적으로 커피가 우리 주변에 보이게 된 것은 아무래도 6,25이후 휴전이 되고 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어릴 적 기억으로 우리 집에서도 인스턴트커피와 소위 무거리(?) 우린 그렇게 부르던 원두를 갈아서 깡통에 담아 나오던 MJB 초록색 라벨과 붉은색 라벨이 붙은 커피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맹해차창은 1940년에 운남성 서쌍판납태족자치주 맹해현에 설립되었다. 당시는 불해차창이라고 불렸다. 맹해차창은 설립이후 2004년 대익으로 민영화되기까지 국가 운영 공장으로서 소비자에게 꾸준하게 인기를 얻었다. 맹해차창에서 2000년 이전에 생산된 차들은 이미 20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노차老茶, 혹은 진년차陳年茶로서 가치가 형성되면서 소장가치가 높아졌다.맹해차창에서 생산한 차들이 특별한 이유는 현재 골동 보이차 시장에서 인기가 있는 차의 대부분은 맹해차창에서 생산된 차들이기 때문이다. 인자급 보이차인 홍인을 비롯하여, 무지홍인,
일반적으로 전통과 맥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같으면서 다른 차이가 있다. 전통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역사의 보편적 개념이라면 맥은 그보다 규모가 적은 집단이나 개인의 실체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절집에 다맥이 없다하니 전통이 없다는 말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어 부연하는 말이다. 속가에서 집안의 가풍은 흔히 몇 대 종손댁이라 하며 그 집안의 맥을 이어오고 있음을 말하고, 그 집안의 가풍 즉 전통은 종손댁을 중심으로 모두가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전통은 공유의 개념에 비중을 두는 것이고, 맥은 독점적인 것에 비중을 둔
골동보이차를 통한 보이차의 이해보이차 시장에서 가장 큰 오해는 보이차는 세월이 오래 될수록 비싸진다는 인식이다. 보이차를 이해하기 위해 1990년 이전의 보이차로 거슬러 올라서 분석할수 있다. 골동보이차는 1950년 이전에 생산한 호급號級, 1950~70년 사이의 인급印級, 1970년 이후에 생산된 숫자급으로 구분한다. 생산 시기가 가장 오래된 호급 보이차에서도 1980년대 숫자급 보이차보다 가격이 싼것이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 대표적으로 1930년대의 정흥호鼎興號, 같은 시기에 생산된 하내호河內號,
국내 보이차가 1980년대 말부터 조금씩 보급 되었으니 벌써 30년을 훌쩍 넘어 가고 있다. 그 동안 보이차 시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초기 자료 부족으로 인한 보이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불신도 꾸준한 연구와 많은 단행본의 번역과 출간을 통해 보이차의 실체적인 접근을 어느정도 이루었다. 최근에는 홈쇼핑을 통해서 판매가 이루어질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크게 상승했다.현재 보이차 시장의 큰 축은 골동보이차를 중심으로 한 노차시장과 고수차의 열광으로 형성된 신차시장으로 나뉘어졌다. 즉 발효된 맛을 추구하는 노차
이제 선선한 갈바람과 함께 차를 들며 명상하기에 좋은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때에 맞춰 전국에서 각종 차 행사가 활발히 열릴 것이다. 차인들이나 차 관련 학계에서 국가 예산 지원을 받아 대형 차 행사를 여는 것은 대중에게 차의 우수성과 차문화의 중요성을 널리 인식시켜 차생활의 대중화 및 차 시장 확산을 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행사가 차 상업주의에 지나치게 매몰되거나 현실과 유리된 채 허공을 향하게 되면 오히려 차에 대한 혼란과 불신을 야기하여 대중을 차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할 우려가 있
2010년이면 10년 전 일이다. 그해 나는 오른쪽 팔 신경이 파열되었다. 높은 온도에 손으로 차작업을 하는 일은 기계가 움직이는 수준의 속도가 필요하다. 해마다 덖음차를 1톤가량 덖어댔으니 팔인들 제대로 남았겠는가. 결국 팔 신경이 파열 되어서 수술을 했다. 덕분에 팔에 흉하게 약 20cm 정도 긴 흉터가 생겼다. 하늘은 나의 차 사랑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시 차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팔을 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2010년 7월 27일 날짜로 제목은 < 대숲 아래 뒤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기록되어 있다.삶이 그러하듯
그해 여름 기억이 생생하다. 곰팡이 사건은 차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2011년 8월 3일분명 실패한 작품이다. 1,000kg이 넘는 차 중에 보관 해 두었던 차 한뭉치가 옮기려는 도중 그 무게감이 다른 뭉치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뭉치를 보관해 둔 것을 풀어 헤쳐 보니 순간 아찔했다. 보관이 잘못 됐던지 아니면 수분이 덜 제거 되었던지 전체적으로 옅은 곰팡이가 확 피어 있었다. 뭉쳐진 차 덩이에는 단 한번도 경험 하지 않았던 노란 곰팡이가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이걸 버려야 하나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긴 장마속에 마
나에게 차는 삶이고 수행이며 창조개발이다. 이른 아침 차 벗이 전화가 왔다. 며칠 전 받은 차가 맛이 전같지 않고 더 순하다고 한다. 다짜고짜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을 해 달라고 한다. 이렇게 예민하고 섬세한 차벗이 있어서 나의 차 연구는 끝이 없다. 천천히 차를 연구했던 옛 기록들을 살펴본다.2011 6월 11일. 발효차를 만들어 보관하는 공간에 문만 열면 차가 익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제부터인가 덖음차를 지속적으로 마시면 속을 차게 해서 위를 갂는다는 결론이 무성하다. 중국차가
한 때 나는 열심히 기록했다. 차를 만들면서 그때 그때 세밀하게 반응 하는 나의 감정까지 기록했다. 차에 대한 전문 지식보다 내가 찻잎을 대하는 마음자세와 찻잎이 나에게 주는 기운까지 감지되고 느껴지는 대로 기록 했다. 당분간 에 그런 생생한 기록들을 공개하려고 한다. 가장 첫 번째로 2011년 5월 30일 기록 된 글을 소환한다. 제목은 < 값진 실패, 발효차> 라고 적혀있다. 무엇이든지 실패를 통해서 좌절 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 2010년 50kg의 찻잎을 왕창 망쳤다. 의도한 차 맛을 내기 위하여
1999년이전에는 덖음차만 만들었다. 냄비 하나 걸고 한해 동안 마실 차를 준비했다. 2000년 봄 부터 차솥을 4개를 걸고 덖음차를 1톤씩 만들었다. 지금 생각 해봐도 아찔하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을까. 그때 경험이 차 맛을 찾아 내는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누가 아홉번을 덖었니, 초의선사가 이렇게 덖었을거라니 저렇게 덖었을거라니 온갖 말들이 난무했다. 나는 그런말에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직접 경험해서 얻은 것으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2003년 처음으로 세상 밖 차꾼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
는 나의 평생 숙원 사업이다. 차 문화가 기성세대들의 전유물처럼 알려져 젊은이들로 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 때문이다. 나의 젊은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어른 스님들께 귀하게 얻어 마시는 차가 늘 갈증이 났고 구하기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내가 직접 차를 덖게 되었고 30년 넘도록 차 맛을 찾아 오늘 날 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는 나이가 드니 차를 덖는 일이 힘에 부친다. 그동안 계속 차 만드는 일을 누군가가 물려받아 배웠으면 했는데 그 인연이 쉽지 않았다.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
차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땅 한 평 없었을 때 나에게 아주 큰 산 하나가 통째로 시주가 들어왔다. 지금 기억에 1993년 이었던것 같다. 산이 통째로 왔음에도 그곳에 집을 건축할 능력이 없었다. 다행이 산 옆에 송어 양식장을 하던 작은 빈집이 있었다. 외딴 곳에 버려진 집이었다. 나는 걸망에 있는 돈으로 인사동에 가서 한지를 사 도배를 했다. 블록으로 지은 집으로 화장실도 계곡물을 이용해서 수세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방바닥에 보일러도 없고 아궁이도 없었다. 연탄아궁이를 놓고 석달간 손수 고치고 나니 제법 집 모양이 나왔다.시주 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