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이전에는 덖음차만 만들었다. 냄비 하나 걸고 한해 동안 마실 차를 준비했다. 2000년 봄 부터 차솥을 4개를 걸고 덖음차를 1톤씩 만들었다. 지금 생각 해봐도 아찔하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을까. 그때 경험이 차 맛을 찾아 내는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누가 아홉번을 덖었니, 초의선사가 이렇게 덖었을거라니 저렇게 덖었을거라니 온갖 말들이 난무했다. 나는 그런말에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직접 경험해서 얻은 것으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2003년 처음으로 세상 밖 차꾼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
는 나의 평생 숙원 사업이다. 차 문화가 기성세대들의 전유물처럼 알려져 젊은이들로 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 때문이다. 나의 젊은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어른 스님들께 귀하게 얻어 마시는 차가 늘 갈증이 났고 구하기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내가 직접 차를 덖게 되었고 30년 넘도록 차 맛을 찾아 오늘 날 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는 나이가 드니 차를 덖는 일이 힘에 부친다. 그동안 계속 차 만드는 일을 누군가가 물려받아 배웠으면 했는데 그 인연이 쉽지 않았다.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
차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땅 한 평 없었을 때 나에게 아주 큰 산 하나가 통째로 시주가 들어왔다. 지금 기억에 1993년 이었던것 같다. 산이 통째로 왔음에도 그곳에 집을 건축할 능력이 없었다. 다행이 산 옆에 송어 양식장을 하던 작은 빈집이 있었다. 외딴 곳에 버려진 집이었다. 나는 걸망에 있는 돈으로 인사동에 가서 한지를 사 도배를 했다. 블록으로 지은 집으로 화장실도 계곡물을 이용해서 수세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방바닥에 보일러도 없고 아궁이도 없었다. 연탄아궁이를 놓고 석달간 손수 고치고 나니 제법 집 모양이 나왔다.시주 받은
차를 마시자. 우리차를 마시자. 외치면서도 정녕 내가 내 놓을 수 있는 대안이 없었다. 뛰는 인건비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인건비도 건질 수 없는 찻잎을 채취할 노동력도 농촌에는 부족하다. 어린 우전 잎 한 사람당 하루 채취할 수 있는 량이 1kg 도 어렵다. 완성 된 차를 잘 만들려면 네 사람이 하룻밤을 꼬박 세워도 10kg를 만들기 어렵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우리 차의 가격은 당연히 비싸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값싼 차를 찾는 소비자들은 중국 차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역시
차를 덖고 연구하고 차를 마시면서 찻 그릇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왔다. 그렇다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볼 줄 모르는 까막눈은 아니었다. 다만 형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내가 차려 놓은 찻자리에서만 사람들을 맞이하고 바깥에 나가서 차를 마실 일이 전무후무 하던 시절 우연히 어느 스님의 차실을 들리게 되었다. 그 스님은 은다관으로만 차를 마셨다. 물론 나에게도 은 다관이 하나 있었다. 잘 사용하지 않았다. 떠도는 헛 소문(?) 때문이다.그 스님 덕분에 분에 넘치는 은 다관을 가지게 되었지만 호사를 누리는 듯하여 사용하지 않고 장
벌써 4년 전 이야기다. 그해 나는 더 이상 덖음차를 만들어 낼 재정적 여력이 없어서 겨우 마실 수 있는 차 10통을 만들었다. 농민들에게 찻잎은 현금이다. 그동안 차 연구에 쏟아 부은 돈을 감당해 내는 일이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전기요금이 석 달씩 밀려서 한전에서 전기를 끊겠다는 통보가 날아오고 심지어 한전 직원이 집까지 찾아오기까지 했다. 아무런 영리적 보상이 발생 하지 않는 덖음차 만드는 일을 접기로 각오하고 실행에 옮긴 그해 봄날이었다. 그런 나의 사정도 모르는 어느 젊은 스님이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스님 차 10g 만
차를 연구하는 일이 어언 30년이 되었다. 누가 만든 차가 최고며, 누가 만든 차가 제일 이라고 규정짓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을 세월이 흐를수록 알아가고 있다. 개개인의 입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차를 배우겠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선방에서 공부하는 스님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알려진 사찰요리 전문가 스님, 이름은 밝힐 것은 아니지만 차 전문가라고 온 나라 안에 소문 난 스님, 대학교수, 사업가, 다도를 가르치는 사범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차 만드는 일을 배우고 함께 연구했다. 그들 중 단 한명도 차를 함께 만들었다
차 농사를 짓는 나도 사월이 되면 마실 차가 바닥이 난다. 여러 가지 차통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니 작년 가을 차 농사를 짓는 사람이 직접 만든 차를 들고 청학동에 찾아 왔었다. 한두 번 마시고 무심히 던져두었다가 오늘 아침에 차를 우려 마셨다. 며칠 전 뒷방 손님과도 함께 우려 마셨는데 그때까지는 괜찮은 차이구나 하며 예사롭게 생각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오늘 아침 퇴수기에 쏟아 낸 엽저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그 차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하나하나 체크를 해 보았다.우선 퇴수기에 버려진 찻잎은 원형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세상에는 병도 많고 치료제도 많다. 그러나 같은 병명이라고 해도 의사의 처방이 다를 수도 있고 약이 같다고 해서 병을 모든 사람이 다 낫는다는 근거도 없다. 이와 같이 차를 만드는 과정이나 차를 알아가는 지식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도 천차만별이다. 그 무엇도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따로 차에 대한 용어나 차에 대한 효능을 과학적이나 의학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다.한때 차에 대한 이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스님정도 되면 차에 대한 이론을 정립해 내 놓아야 한다.”고 주문 해 온 적이 있었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한달이 금방 지나간다. 3월 가 있었던 날이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사월 를 준비한다. 이번에는 멀리 제주에 사는 분이 참석하겠다며 예약을 했다. 청년차회는 참여하는 인원은 작지만 단순한 찻자리가 아니다. 우리 차 문화를 알리는 파급 효과를 내고 있다는데 대하여 참으로 뿌듯하다.어제는 낮선 전화가 걸려왔다. 성균관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다례원 직원이라고 밝혔다. 차문화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를 만드는 체험시간을 갖고자 하니 체험비가 어떻게 되냐고 물어왔다. 또한 차 한편도 체험자들이 가져가기를 원했다.
한 때 나는 해마다 작설차를 일년에 1톤을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판매 목적이 아니었다. 차 맛을 내는 일에 미쳐있었다.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해도 한철 차 작업을 마치고 나면 늘 아쉬웠다. 찻잎이 자라서 더 이상 차를 만들 수 없을 때 까지 차를 만들었다. 바로 바로 현금을 주고 재정이 바닥이 날 때까지 찻잎을 샀다. 차 작업 한창 벌어지는 사월에 불자들은 부처님 오신날 연등을 달기위해 찾아와 연등을 달고 돈을 미리 주고 간다. 나의 차 연구에 드는 일체 돈은 해마다 부처님 오신날 연등 다는 돈으로 충당이 되고 늘 모자랐다. 절
오늘 우연찮게 접한 방탄소년단 소식을 접했다. 사찰에서 찍은 시리즈 사진을 보고 젊은이들이 따라서 같은 장소 같은 포즈를 취하여 sns를 통해 공유한다고 한다. 방탄소년단 덕분에 불교의 이미지가 홍보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또 다른 하나의 뉴스는 경남도청 의회 회의실에서 세계차문화 엑스포 추진위원회가 발족 되었다는 소식이다. 추진 위원들이 어떻게 심사되고 평가되어 추대 되었는지는 모르나 개인적 생각으로는 그 또한 아쉬움이 많았다. 타이틀이 동네 잔치도 아니고 명색이 세계차문화엑스포라는 이름으로 발족하는 추진 위원회라고 하는데 좀 더
작년 3월 1일었다. 청년차회가 발족 한 날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두고 그 날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이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20대부터 70대까지, 김해, 광주, 통영, 마산에서까지 많은 분들이 차회에 참석했다. 차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모였다. 그날도 기타연주 포크송과 판소리 한마당이 열렸다. 타이틀은 그랬다. 마음이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다 모이라고 공지를 했다. 그날 참석자 중 최연소 장건우(초등학교 교사) 군이 청년차회 회장을 맡았다. 약속은 전국을 순회 하면서 청년들이
나에게 차 는 간결함과 명쾌함과 중도사상을 알게 해준 특별한 선물이다. 또한 차 맛을 알아 차리는 마음을 따라 내 안에 움직임을 간파 할 수 있었던 공부이기도 했다. 누구는 호흡을 통해 알아차림을 공부하고, 누구는 나처럼 한치오차 범위를 허용 하지 않는 차의 본 성품이 나를 공부 하게했다. 또한 나에게 차란 무엇인가. 다산과 초의 그리고 추사가 남겨 놓은 차향과 우정에 대해 기록된 이야기를 읽고 감동 받아 긴긴 날들을 함께하며 그 향기에 취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차는 홀로 가는 길에 큰 스승이 되었고 벗이 되었다.차꽃은 늦가을
어젯밤 네 가지 차를 마셨다. 내가 만든 작설차와 80년대 말 보이청병( 흔히들 7542 라고 하지요) 과 몇 년 전 중국에 가서 직접 차를 만드는 분으로부터 구해서 어느 스님께 전하고 한편 얻은 지묵당( 흔히들 운보연)상표가 붙은 고수차 잎으로 만든 차( 2009년)를 마셨다. 제다한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지묵당 차는 내가 그동안 마셔본 차 중에서는 맛과 향이 으뜸이었다.내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가꾸고 있는 200년 된 금천차밭과 인연이다. 차를 만드는 초창기부터 나는 그냥 찻잎이 좋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 밭 차 잎만 사용했다.
산골스러운 나의 체질 덕분에 두달간 목표를 정하고 떠난 인도 여행은 감기모살로 인해 패잔병처럼 20일 만에 중단하고 돌아왔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한 준비없이 길을 나선 탓도 있었다. 평소 생활습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중요하다. 육체에 길들여지는 습관도 마찬가지다. 먹고 입고 숨 쉬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 또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너무나 중요하다. 몸과 마음이 평소 생활을 오롯히 기억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다른 기운이 침범하면 견뎌내지 못하는 아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몸이고 마음이다. 여행
인도 사람들은 참 부지런하다. 어디를 가나 이른 아침 부터 생활터전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런 반면에 골목골목이 참 지저분 하다. 자기 눈 앞에것만 관심이 있는걸까, 어떤 골목은 깨끗히 빗자루 질을 해서 깨끗하다. 신전은 물 청소를 해서 깨끗하나, 신전 아래 골목길은 지저분 하다. 며칠 전 단체로 다녀간 갠지스 강을 인도에서 만난 두 아가씨와 다시 찾았다. 일몰을 보기위해 보트를 탔다. 한국 이름 철수를 사용하는 철수씨 보트는 한국 여행객에게 꽤나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그의 노련한 한국어와 인도의 크고 작은 역사에 대한 사연과
붓다가야(보드가야)에서 버스를 타고 3일을 달려왔다. 순례단은 한국 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합쳐 20년간 애써 일구어 놓은 천축선원에 도착했다. 늦은 밤 이지만 주지스님과 한국에서 미리와서 수행하고 있는 불자들의 환송을 받고 여장을 풀었다. 도착하자마자 차실에 안내 되었다. 누구보다 차문화에 관심 많은 내가 우려 내 놓는 차 맛에 집중 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사찰이나 차를 꽤나 마신다고 소문 난 차인의 차실에 가더라도 내 놓은 차는 무조건 중국보이차가 먼저이다. 차 농사를 짓고, 차를 만들고 차 문화를 보급하는 입장에서 보노
인도로 떠난다는 설레임으로 무작정 마음을 내고 짐을 챙겼다. 베낭 하나에 속옷이랑 양말만 챙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짐이 늘어갔다. 나를 염려 해주는 분들이 보내 온 의약품이랑 옷가지며 핫팩 등등이 쌓여갔다. 결국 가방이 3개가 되었다. 부처님의 성지 도량 붓다가야에서 내가 만든 차 한잔 우려 바쳐 올리고 싶은 심정에 헌다를 할 수 있는 찻 그릇을 모두 준비하다보니 가방이 3개로 늘었다. 내 평생 없을 줄 알았던 인도행이 너무 기쁜 나머지 온 동네방네 자랑질을 했다. 여행길 잘 다녀오라며 격려와 염려와 축하 해 주려고 많은 분들이 너
새해 첫 날이다. 어제 저녁부터 차를 좋아하는 벗들이 멀리 충주 진주와 청주, 서울에서 한 달음에 달려와 밤새 차향에 젖었다. 차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하나를 두고 생면부지의 초면인데 십년지기 처럼 돈독해져 가는 모습을 보노라니 차를 만들고 연구 해 온 수십년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곧 난생 처음으로 인도에 간다. 고맙게도 김해에 자리하고 있는 샤티 아르마 수행공간 방장 스님께서 인도에 있는 국제수행학교 개교기념일에 즈음하여 초대해 주신 덕분에 인도행이 결정 되었다. 내 생에는 인도에 갈 기회는 없을 줄 알았다. 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