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간 21세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락구기법을 연구하고 있는 양동엽작가는 자연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발색작업을 작품에서 구현해내고 있다. 그것은 작품의 소장자에게 항상 가까이에서 즐겁게 즐길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다. 양동엽 작가는 “ 그릇은 아름다워야 하고, 눈으로 보기에 즐거워야하고, 사용할 때 촉감이 좋아야 한다고 봅니다. 락구다완은 가루차의 생명인 격불과정에서 거품이 잘생겨나야 하고 차 맛이 독하지 않고 부드럽게 하는 특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도예아카데미연구원 원장인 해동 양동엽은 캐나다 밴프 예술센터와 캐나다
이슬 내린 봄 동산에서 무엇을 구할 건가/ 달밤에 차 끓이며 세속 근심 잊을까. 가벼워진 몸은 삼동 유람도 힘들지 않고/ 상쾌한 골격 잠깐 사이 가을 구월 되었네.좋은 품격은 절에서도 합당하고/ 맑은 향기는 술 마시고 시 읊는 일도 허락하네.누가 보았는가 영단이 오래 산다는 증거를/ 불문 향하여 그 사유 묻지를 말게.얼었던 대지에 물기들이 스며든다. 여기 저기 나무들 사이에서는 꽃망울들이 시위를 하며 꽃을 피워낸다. 어느새 회색 세상은 화려한 꽃의 세상으로 변해간다. 옛 사람들은 기운 생동하는 계절의 변화를 삶속에 깊이 각인시키며
다실은 차인에게 최상, 최고의 공간이다. 자연을 응축한 ‘작은 우주’다. 다실에 자리한 흙과 나무, 물과 불에서 그런 것을 느낀다. 다실에 있는 일수일목一水一木은 계절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맞볼 수 있게끔 해준다. 다실 그 자체의 미적 감각과 시적 감흥을 만끽하게 한다. 여기에 차를 즐기는 풍류의 도가 곁들여져 예술적 신묘함을 발산시킨다. 삼매의 경지다. 이 경계를 통해 다선일미茶禪一味를 만끽하므로 다도라고 일컫는다. 다실에는 다기들이 올망졸망 있어야 그 가치가 충분히 살아나듯이 차인도 다실에 안주해야 그 참된 멋과 맛을 풍긴다. 이
차 배우는 일은 5분이면 족하다. 차 마시면 되는 거니까. 차는 물을 끓여 우려서 목으로 넘기면 된다. 이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는 5분쯤 걸린다. 이렇게 차 마시며 사는 게 차생활이다. 많은 차인들이 기본은 제쳐놓고 비싼 다구들에나 눈독 들인다. 골동품 명품에 매달려 사치와 호화에 빠진다. 심할 경우 돈독에 혈안이 되고 자리나 세력다툼에 망상을 떨고 있다. 개탄하는 차인들이 늘어나고 차 무리를 떠나는 차인들도 적지 않다. 차 생활이 이런 지경이라면 조선 순조의 부마 해거도인 홍현주가 진도부사 변지화를 통해 굳이 초의선사께 차를
옛 선인들은 차를 즐기고 가까이하면 도에 이른다’며 ‘차를 마셔 정신이 맑아지면 시름을 잊고 깊은 밤 용 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했다. ‘용 우는 소리’란 우주의 생명의 소리를 말한다.“차인은 차로 안정과 화목을 찾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도를 밝혀야 한다. 차로 능히 생사를 파악하고 초월의 경지를 이루어야 한다.”옛 조사스님의 말씀이다. 차인은 염불이나 기도 등 종교적 형식을 떠나 차로 번뇌망상을 해소하고 업장을 소멸해야 한다. 차를 자꾸 마시기만 해도 도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다도다. 관련 의학자나 과학자의 연구결과에
다도도 기技와 예藝와 도道를 그렇게 수없이 많이 연마하고 수련해야 한다. 선인들은 ‘차생활을 하려면 기술 10년, 예술 10년, 도 수련 10년 합해 30년은 닦아야 무언가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차 한 잔 마시는 거야 아주 간단하다. 물을 끓여 차관에 달여 마시면 된다. 그런데 차 마심이 예사로 거듭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불완전 속에서 차의 깊은 뜻과 지극히 그윽하고 오묘한 경지를 만나 깨닫게 된다. 그간 많은 차 마심과 다른 사람들의 차생활을 보면서 수련을 쌓는다. 이런 과정에서 분별심을 나타내는 따짐의 상태나 지각의 사
인간은 불완전하다. 태어나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완전한 모습으로 산다. 그래서 완전하게 살려고 발버둥친다. 처음 다도에 입문하는 수강들에게 “좀 까다롭고 어려운 듯한 그런 예절 행위를 감수하겠느냐?”고 묻는다. 대부분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대답한다. 규격화된 법도法度를 수련하는 것이 보다 완전한 차인의 모습이요, 법식法式을 따르는 인간다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차생활에서 법도는 필요하고 중요하다.여성다움이나 인간다운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보다 완전한 폼(form), 격식이 요구되고 있다. 또 물어본다. “차를 마심에
차를 마시기 위해 차를 담는 그릇이 찻잔이다. 차의 빛깔과 향기와 맛을 본다. 그리고 찻잔을 감상한다. 찻잔을 보고 만져 감촉을 느끼며 아름다움을 즐긴다. 찻잔의 실용적인 매력을 찾아 즐겨 느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말차를 마실 때는 정식으로 다완茶碗을 감상하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다완 감상 순서를 소개한다.1. 배견拜見1)먼저 다완을 자기 무릎 앞 가까이에 놓고서①다완의 전체 모양을 본다. 이를 경境을 본다고 한다.②다완의 모양이 균형이 잡혔는지 여부를 본다.③다완의 앉음새 등을 살핀다.2)다음에 두손으로 다완을 들고
차의 각 유파는 나름대로 저마다 선호하는 합리적 법도를 운용한다. 어떤 유파가 옳고 어떤 유파는 잘못됐다고 평가 할 수 없다. 법도를 확립한 규격기준의 잣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잣대를 쉽고 편하게 하는 데 두어야 한다. 팽주와 손님이 같이 쉽고 편하게 차를 다리고 마시는 게 좋다. 동양의 사고(철학)는 세상 만물이 음과 양으로 양분되어 있다. 서로 화和로 어울려 하나(불이不二)가 되게 하는 것 즉,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를 위해 서로 쉽고 편하게 해야 한다.하늘은 쉽게 비를 만들고 땅은 편하게 빗물을 받아들여 만물을
다도의 핵심은 선이다. 차원 높은 삼매는 차생활과 다도의 밑바닥에 참마음이 자리할 때 성취된다. 차를 하는 자리에서 참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참마음을 잃은 다도나 차생활, 차회는 단순한 취미나 놀이로 전락한다. 차인이 참마음을 망각하면 불순해져 허영과 사치에 빠지고 끝내 타락의 늪으로 떨어진다. 어느 해 한 찻자리 대회에서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다. 값비싼 화려한 은銀다기로 장식한 찻 자리가 대상을 차지했다. 은다기는 차의 향과 맛을 떨어뜨린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고가이어서 아주 좋은 것으로 여겨 대상을 줌은 사치와 허영을 조
차를 배우는 사람은 우선 차를 좋아하는 일부터 배워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잘 알게 되고 잘된다. 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도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차는 좋아하는데 차맛은 별로라고 하는 이들은 결국 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거꾸로 차맛은 좋은데 차를 달이는 일과 부수적인 조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도 차를 좋아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난다.선천적으로 차를 좋아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마는 100% 완전히 차를 좋아 하기까지에는 아직 거리가 있다. 차를 좋아하는 것도
차 생활은 ‘다만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 마시는 일’이다. 차마시는 일은 이렇게 쉽고 편하고 단순하다. ‘다반사’茶飯事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공연히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한다. 이는 차를 마시는 근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생활은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면 된다. 차를 달이거나 마시는 모습 속에 자신의 운명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차를 우려낸 맛과 차를 마시며 느끼는 맛에 자신의 삶이 담겨져 있다. 차를 달이거나 마실 때 그릇 끼리 부딪혀 소리를 내게 하는 사람은 매사에 잘 투덜대고 시비를 부린다
서쪽으로 저무는 붉은 태양의 찬란한 낙조는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찬란한 아름다움 뒤에는 텅빈 공허가 있고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갈망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만추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마지막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다완은 진사辰砂의 붉은 기운이 다완 전면에 나타난 작품으로서 작가의 정열이 여과 없이 나타난 다시없는 수작秀作이다. 라쿠 소성의 특성상 완벽한 환원소성을 할 때만이 이와 같은 붉은색을 얻을 수 있는데 소성당일 천기天氣(바람, 온도, 습도, 작품이 톱밥에 묻히는 시간 등)와 가마 안에서 환원이
차가 끓어 향이 맑을 때 세상으로 난 산길은 온통 흰 세상으로 변한다. 잎진 나무에 흰눈 쌓일 때 친구들 불러 모아 차 달이고, 약 달이니 새로이 힘이 솟는다. 이 작품은 진하지도 또 옅지도 않는 진중한 푸른 청색의 컬러가 일품이다. 아침 첫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는 고요한 산하를 연상하며 제작된 작가의 의도가 잘 나타난 다완이다. 안정적인고 넉넉함이 묻어나도록 디자인된 기器의 형태形態가 1인 다완이 확대된 형태로서 파티에서나 차회茶會에서 말차 이외에도 연차 등을 나눠먹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다완에는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며
해가 가을 처럼 진다. 앙상한 가지에 낙엽이 걸렸다. 강물을 조금 길어다가 홀로 차를 달인다. 푸른 자연이 넘실거리며 내안으로 들어온다. 이 작품은 푸르른 자연 한가운데에서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상상을 하면서 코발트 계열의 유약을 시유했다. 작가의 의도대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세계가 그대로 표현되었다. 자아는 다차원의 세계를 담고 있다. 자아의 한계는 없다. 그래서 자아는 다차원의 우주다. 이 다완은 우주를 품고 있다.
하늘의 기운이 서늘하다. 어느덧 가을은 너무 깊은 곳까지 와있다. 수런거리던 자연은 곧 말을 멈추고 깊은 침묵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침묵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침묵이다. 침묵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섭리속에서 아름답게 빛난다. 그래서 옛 성현은 우리에게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을 남겼다. 그 성현은 침묵이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해주는 청량제라고 봤기 때문이다. 푸르른 녹색 빛의 산하에 불이 붙은 듯이 붉은 단풍이 곳곳에 피어나는 형상을 담아낸 다완이다. 고화도의 온도로 초벌 된 기물에 얇게 시유된 유약에서 발색된 색상으로서 매우 특
세상이 온통 불타오르고 있다. 찬 바람이 깊어질 때 마다 낙엽은 허공 휘저으며 곧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리고 있다. 푸르디 푸른 허공은 깊어질대로 깊어졌다. 지금 세상은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다. 2016년에 발표된 작품인 ‘심연의 하모니 -1’은 다른 다완들과 두배 이상 큰 대작이다. 가을 하늘을 닮은 깊은 마음속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담아냈다. 작가의 의도대로 녹색의 푸르름이 비취색으로 승화되어 작품의 전면에 잘 나타난 다완이다. 형태는 무엇이든지 받아줄 수 있도록 넉넉함이 묻어나는 큰 기형器形을 성형 했고,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풍요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을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세상의 마지막 처럼 붉은빛으로 세상을 태우기 때문이다. 스산한 바람이 불면 붉은꽃잎들이 화염처럼 대지로 낙하한다. 채우고 버리는 미학을 만추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번 작품 ‘만추’는 가을의 끝자락에선 세상의 붉음을 담아내고 있다. 이 다완은 만추晩秋의 계절에 황금들판이 끝없이 이어지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기물의 바깥 배경으로 사용된 유약은 황갈색 유약과 붉은색을 나타낼 수 있는 유약을 얇은 붓 터치를 하여 환원염이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산이 먼저 깊어가고 강이 깊어가고 차인의 마음이 깊어간다. 작가의 작업실은 비슬산 자락에 있다. 새벽 안개 비슬산, 노을이 지는 비슬산 그리고 철 마다 옷을 갈아입는 비슬산의 경이로운 모습이 내 작업에 깊은 영감을 준다. 그런점에서 비슬산은 내 작품의 산실이기도 하다. 이 다완茶碗은 비슬산의 경이로운 운무가 산을 휘감으면서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담아낸 것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붓 터치로 녹색과 청색의 유약으로 표현해낸 명작중 하나이다. 이 다완에 말차를 음미하며 음용하면 작가의 에너지 넘치는 기운과 비슬산의